목회자 컬럼
베풀며 사는 여유
옛날 한 한적한 시골교회에
‘밤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밤잠이 없는 노목사님이 교회당에 나갔다가 교회당 구석에서 인기척을 들었습니다. 웬 사람이
지게에 짐을 지고 일어나려고 하다가, 힘이 부쳤는지 미쳐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었습니다. 옛날 한국의 초대교회에는 ‘성미’(聖米) 제도가
있었습니다. 밥을 짓을 때 쌀 한숫가락, 두 숫가락을 떼어 모아두었다가, 주일날 교회의 성미통에 넣어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중에 일용할 양식이 떨어진 사람이 살짝 와서 그 쌀로 급한 끼니를 떼우게 하는 것입니다. 자칫 가난한데 자존심까지 상하지 않도록, 후미진 곳에 성미통을 두어
약한 자의 마음을 배려하는 섬세함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노목사님이
보니, 한 밤중에 교회 성미통을 찾아와서, 쌀을 큰 자루에
퍼서 드는데, 뒷모습을 보니 자기 교회 성도 같지는 않았습니다. 밤손님이었던
것이지요. 성미통에서 쌀을 큰자루에 잔뜩 퍼내긴 했는데, 힘이
부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목사님은
지게 뒤로 돌아가 도둑이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지그시 밀어 주었습니다. 놀란 도둑이 힐끗 뒤돌아 보았습니다. “그것 가지고 식구가 먹고 살겠는가? 좀 더 넣어서 가져가게. 내가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네.” 하고 따뜻하게 말한 후, 자루에 쌀을 더 담아주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
낯선 사람 하나가 가족과 함께 주일예배에 앉아 있엇습니다.
종교를 한자로는, 宗敎라 합니다. 마루종(宗)자에, 가르칠 교(敎), 인간의 마루 즉 근본을 가르침이요, 세상 모든 삶의 뿌리를 말해준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인간의 심성의 뿌리를 터치하여 감화를 끼치고, 그가 사회 문화에 젖어 살면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삶에 대한 안목을 열어줌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하려 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미국 경제가 쉽게 일어서지 못하며, 실업율은 더욱 높아졌다 합니다. 자칫 손이 안으로 오그러들기 쉬운 때입니다. 조직은 효율성의
이름으로, 개인은 생존에 대한 두려움으로, 옆에 있는 지쳐 있을 수 있는 형제/자매의 손길을 외면하기 쉬운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앙한다 함은, 문화의 흐름을 바꿔놓을 삶의 가치를 발견함이요, 자기를 살리면서 다른 사람도 함께 사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한다 함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 베풀며 사는 것, 주면서 사는 여유, 그것이 삶을 풍요하게 하고, 사람을 감화시킵니다.
노목사님의 단순하고 소박한 사랑을
갖고 싶습니다.
저는 이 글 중 "후미진 곳에 성미통을 두어 약한 자의 마음을 배려하는"이 가장 좋았습니다.
그런데 노목사님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흘러넘치시는 하나님 종의 모습을 봅니다.
사랑과 함께 무의식 중 전도를 하시네요.
저라면 도둑이 무안해 할까봐 그저 바라보다 슬그머니 돌아섰거나
아니면 "도둑이야!" 라고 소리쳤을텐데...
그래서 그 다음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되는 거지요.
가난한 도둑은 몇 번 더 와서 성미통에서 쌀을 가져가는 거예요.
그리고 목사님은 늘 보시고도 못 본 척 하시는 거지요.
어느날 목사님의 사랑을 알게된 도둑은 감동 백배로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의 새로운 일꾼이 되는 거랍니다.
그런데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





나의 권리가 무었인지 알지만 그 권리에서 일보 후퇴하고,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 무었인지를 알면서도 나의 몫을 고집하지 않는, 베풀며 사는 너그러운 여유가
쌀을 훔치러 들어갔던 좀도둑으로 하여금 예배자의 모습으로 성전을 다시 찾게 만든 힘인것같습니다.
너와 내가 경쟁하는 삶, 앞만 보고 무작정 달려야 하는 현대 생활이지만
혼자만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다시한번 생각케 합니다.